인류가 이룩한 역사 속에는 황제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때로는 자상한 한 인간으로, 혹은 지혜로운 성인으로, 아니면 냉혹한 폭군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들 황제를 중심으로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 탄생하고 그로부터 다양한 이야기가 나온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통치에 반발하던 이집트를 정복한 인물이다. 이집트를 정복한 그는 지중해 동부와 서부를 잇는 상업과 행정의 중심지 기능을 수행할 도시를 건설하는데, 그 도시가 바로 알렉산드리아다. 이집트 정복을 마친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1년 경에 티그리스 강 동쪽의 가우가멜라에서 당시 페르시아의 통치자이던 다리우스 3세와 결전을 벌였다. 이 결전에서 다리우스 3세는 패배하고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진시황
진시황은 자신이 세운 나라가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의 염원과는 달리 그는 천하를 통일한지 얼마 안되어 객사했으며, 그가 세운 제국도 무너지면서 천하는 다시 전란에 휩싸였다.
한 고조 유방
역사적으로 볼 때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일반 평민이 황제 또는 왕이 되는 일은 지극히 드문 경우이다. 이렇게 볼 때 한낱 비천한 백수에 불과했던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고 초대 황제에 올랐다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승리'였다. 이처럼 비천한 출신 때문에 유방과 그의 부하들은 종종 무례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유방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진짜 인재를 알아보고 정중하게 대했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는 군 통수권을 가졌고, 또한 원로인 1인자 칭호도 받으면서 귀족 원로원을 장악했다. 그는 또한 유명했던 카이사르의 후계임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이을 사람을 직접 정함으로써 권력의 상속화를 제도화한 인물이다. 그에 따라 아우구스투스 이후에는 로마제국이 모든 권력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는 절대적인 황제국가로 자리잡았고, 이후 200년 동안은 평화를 유지하는 이른바 '팍스로마나' 시대로 접어들었다.
샤를마뉴
샤를마뉴 황제는 여러 정책 중에서도 특히 문치에 각별한 힘을 쏟았다. 당시 수도였던 아헨에 학교를 세우는가 하면 각 지역에 있는 수도원에도 학교를 부설했다. 그리고 제국의 밖에서도 널리 학자를 초빙해 오기도 했다. 이런 샤를마뉴의 노력으로 서유럽의 문화는 다시 부흥하면서 '카롤링거 르네상스'로 불리는 시대를 맞았다.
송태조 조광윤
송태조는 수문제와 마찬가지로 왕위계승의 혼란을 틈타 그 기회를 활용해서 역성혁명을 일으켰다. 하지만 송태조는 즉위 후 전 왕조의 황족을 살육했던 수문제와 달리, 전왕조의 친인척들을 정중히 대접했다. 그리고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준 공신들을 내치지 않았다.
하인리히 4세
교황이 파문을 거둬주지 않는다면 자신의 앞날을 장담할 수가 없었던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이 만나줄 때까지 내복바람에 금식을 하며 3일을 버텼다.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황제의 신분을 떠나 성문 밖에서 추위에 떠는 신자를 자비의 교황이 내팽개쳤다는 오명을 덮어쓸 수 없었던 그레고리오 7세는 하는 수 없이 성문을 열게 하고 하인리히 4세를 만났다. 하인리히 4세는 무릎을 꿇고 교황에게 용서를 구걸했으며 그레고리오 7세는 자신이 집전하는 미사에 하인리히 4세를 참석시킴으로써 그에 대한 파문을 거둬들였다.
칭기즈칸
테무진은 1206년에 100만 명에 이르는 인구와 2000만 마리에 가까운 가축을 보유한 새로운 나라를 세웠는데, 나라의 이름은 예케 몽골 울루스(큰 몽골 나라)였고, 통치자에 대한 칭호는 칭기즈칸 이었다. 칭기즈칸은 이후 1215년에는 금나라의 수도인 오늘날의 북경을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고, 1219년에는 원정에 나서 당시 호라즘 제국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다.
샤 자한
샤 자한은 그의 아내 였던 뭄타즈 마할이 출산 중에 사망하자 매우 큰 슬픔에 잠겼다. 그리고 그녀를 기리기 위해 샤 자한은 대리석, 벽옥, 수정, 진주, 에메랄드, 사파이어 등 값비싼 보석과 장식재들을 아시아 각지에서 들여와 매우 크로 화려한 묘역을 조성했다. 이것이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타지마할이다.
나폴레옹 1세
나폴레옹은 위원회를 결성하여 대혁명의 원칙과 성문법과 관습법에서 보존해야 할 부분들을 하나의 문헌으로 작성했다. 이것이 바로 민법전이다.
빌헬름 2세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됐다. 이에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세르비아에 보복할 뜻을 빌헬름 2세에게 알리면서 적극 지원해달라는 요청도 곁들였다. 이 요청에 빌헬름 2세는 '적극 지지'의 뜻을 밝혔다. 그리고 이어서 세르비아에게 안전보장을 해주었던 러시아가 개입을 선언했고, 러시아의 동맹에 따라 프랑스도 개입을 선언했다. 이로써 세계 1차 대전이 시작되었다.
'상식 및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료 구조 및 알고리즘 (0) | 2021.12.03 |
---|---|
앰프 역할과 기능 (0) | 2021.12.02 |
지하수 - 땅속의 물 (0) | 2021.11.30 |
빵 - 유래와 기원 (0) | 2021.11.29 |
데이터 마이너 - 자료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 (0) | 2021.11.25 |
댓글